fc 도쿄 당일치기 원정 작전 실패!!!

울산의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J리그 상대로 결정된 FC 도쿄!! AFC 홈페이지에서 일정을 검색해 보다가 깜짝 놀랄만한 정보를

발견!! 3월 20일 평일 경기가 14시에 열린다는 것!!


오잉? ㅇㅅㅇ?? 왜 평일 경기가 오후 2시지? 검색을 해보니 일본에서는 춘분이 공휴일이라서 쉬는날로 추정된다.

그럼 화요일 오후 경기라면 회사 땡땡이 치고 일본으로 날라봐?? 비행기 표가 얼마지??



검색을 해보니 최저가가 15만원!! 택스를 포함해서 30만원이 넘지 않는 금액이다. 가난한 직장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다. 물론 다녀와서 한동안 손가락 빨아야 겠지만.. 게다가 아침 8시에 출발해 오후 6시 20분에 돌아오는 일본항공이

있다는 것!! 최근 유행하는 대마도 당일 면세 관광 처럼  "저 라멘이 땡겨 점심때 일본가서 라면 먹고 왔어요" 라고 허세를

부리듯, "축구가 보고 싶어서 일본 다녀 왔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들기 시작했다.

나리타 도착시간이 10시이기 때문에 두시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고, 가는길에 라맨 한그릇 먹고 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는길은 단 두시간 가량의 여유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기장이 이동거리 한시간 안에만 있다면 나리타 공항에

줄기차게 나올 마지막 탑승 안내를 들으며 비행기를 탈 수 있겠지만, 한시간이 넘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며 구글

어스를 열었다.

FC 도쿄의 홈 경기장은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설마하면서 구글어스를 검색했는데.. 오.. 마이.. 갓..


이건 완전 도쿄 횡단이다. 아무리봐도 멀다. 절대 한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거리를 확인해보니 무려 97.3킬로미터!

당연히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는 최단거리다. 신간센이 나리타에서 경기장까지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한 거리다.



예상 소요 시간 1시간 26분. 물론 차가 쭉 달린다는 가정에서이다. 97킬로면 울산에서 김해를 갈 수 있고, 서울에서 동쪽으로

달리면 강원도에 있을 거리다. 결국 당일치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역시 직장인이 땡땡이 쳐봐야 뭐하냐며

회사에 충성하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들뜬 기분을 가라앉춰야만 했다.

뭐.. 내가 안가도 FC 도쿄 정도면 사뿐하게 이겨주겠지 ㅋㅋㅋㅋㅋ
by Jude | 2012/01/11 22:32 | UHFC - MY LIFE | 트랙백 | 덧글(1)
이진호, 이제는 그를 보내줘야 할때..




2012년 1월 10일 울산이 이근호 선수를 영입하면서 대구에 이진호를 보상선수로 이적시켰다. 울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05년

울산현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이었던 그의 이적으로 울산의 팬들은 많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제 곧 그를 대구로

떠나 보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다. 그와 함께했던 9년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진호가 울산에 오기까지.. (~2002)

2009년 겨울, 이진호와 함께한 송년의 밤에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울산현대의 경기를 보면서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그리고 울산현대의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학성고 시절 과감히

브라질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브라질에서 발음하기 힘들어 과감히 Diego란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사인을 보면 Diego가 들어가 있다.



이진호는 처음부터 브라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히작했다. 사실 15세의 나이에 그가 속한 클럽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으며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진호가 말하길, 15세 이하의 대한민국 유학생들은 대부분의 클럽에서 최고의 기량을 이지만 그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유는 마의 16세를 넘기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함께 뛰는 서양인들이 급성장을 하게 되면서 신체조건이

우월해 지고, 서서히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독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진호는 유학생들이 힘들었던 마의 16세를 무사히 넘기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호와 함께 2002년

이탈리아 세리에 A리그 키에보 베로나로 정식 계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세리에 A 페루지아 소속에서 뛰었던 안정환이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이탈리아 전에서 극적인

동점골로 인해 이탈리아는 세리에 A의 외국인 선수 쿼터를 한 명 축소시키게 되었다. 결국 적은 외국인 선수 쿼터로 인해

이탈리아의 구단들은 즉시 전력감의 선수를 선호하게 되고, 유망주였던 그는 이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행히 울산현대에서 이진호를 불러주었고, 2003년 정식으로 울산에 입단하게 되었다.



울산현대에서의 새출발 (2003~2004)

이진호는 2003년 브라질 유학파 5인방으로 불리던 이형상, 송한복, 최우석, 이호와 함께 울산에 입단을 했다. 그의 나이 18세,

아직 어린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김정남 감독은 그의 능력을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그리고 2003년 12월 21일 하나은행 FA컵

8강전에서 꿈에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선발로 출장한 그는 김포 할렐루야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하며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특히 후반 7분에 터진 두 번째 골은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이 터뜨린 골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골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골이었다.

2004년 1군에 정식으로 등록을 하였고, 인천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K리그에 입성하며 그의 꿈은 이루어지게 된다. 출장기록은

단 세경기였지만 다음 해 최고의 활약을 위한 담금질이었다.



이진호의 전성기 (2005년)


이진호는 2005년 잊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내게 된다. 단순히 유망주에서 울산의 슈퍼 조커로 변신을 하며 울산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게 된다. 24경기에서 5골을 기록했고, 높은 제공권으로 단짝 마차도를 득점왕으로 등극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타켓형 스트라이커라는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팬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두 경기의 주인공이 된다.

1. 울산 k리그 최초 팀 300승 달성

2005년 10월 2일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 있었던 K-리그 부산 I-Park 와 원정경기에서 전반 7분만에

루시아노에게1골을 허용하며, 끌려갔다. 전반 40분 뽀뽀가 경고
누적으로 인해 퇴장을 당했지만 경기는 계속 부산에게

끌려가면서 전반전을 마치게 된다. 이진호는 후반전 교체로 출장을 하게 되었다.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던 울산은 후반 35분 다실바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하며 사실상 경기를 뒤집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3분뒤 이진호가 추격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40분, 41분 각각 이종민, 마차도가 동점 및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300승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이진호의 활약으로 3분만에 세 골을 넣는 진기한 기록이 달성된 날이기도 했다.

2. 플레이오프 성남전

2005년 11월 9일 전북에게 기적과 같은 3대2 역전승을 거두고 마지막 4강 티켓을 따낸 울산의 다음 상대는 성남이었다.

이진호에게는 상무 입대가 확정되고 가지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다. 울산은 전반 남기일의 선취골로 끌려가면서

결승 진출이 위대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후반 시작과 함께 이천수의 크로스를 받은 마차도가 오버헤드킥으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을 했고, 38분 그날의 영웅 이진호의 극적인 헤딩 역전골로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입대 전

울산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으며, 결국 우승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남과의 플레이오프를 마치고 입대를 한 그는 군대에서 피로골절 판정을 받고 2개원 입영 연기를 통보받고 울산으로

복귀해 챔피언 결정전 2차전 후반에 교체출장을 하면서 결국 우승 트로피를 손에 안은 채 입대를 할 수 있었다.


너무 빠른 군입대, 아쉬운 선택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온 기회 (2006년 ~ 2008년)


이진호는 만 21세의 어린 나이에 군 입대를 선택하게 된다. 이제 울산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의 입대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입영을 끝까지 연기하다가 뒤늦게 상무로 가는 예가 많았지만

그는 과감한 입대를 선택했다. 사실 2006년은 울산으로서 매우 힘든 시즌이었다. 수퍼컵 우승 및 A3 챔피언쉽 우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리그에서는 득점력 빈곤으로 수비수인 박동혁과 유경렬의 득점이 모든 공격수들의 득점에 합보다

더 많을 정도였으며, 이진호라는 파트너를 잃어버린 마차도는 더이상 득점 기계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만약 그가

울산에 남아있었다면 울산 공격의 핵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상무 입대 첫 해에 부상으로 인해 단 11경기 출장에 그치며 주전경쟁에 밀리게 되었다. 사실 20대 초반은 가장 왕성한

성장을 보이는 시점인데 상무는 경기에는 출장할 수 있었지만 그를 성장시켜줄만한 곳은 아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

에서 더이상의 성장이 멈춘 그는 2007년 24경기를 출장하긴 했지만 단 두골이란 기록을 남긴 채 울산으로 복귀했다.


김정남 감독은 울산으로 돌아온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스트라이커 우성용이

노쇠한 상태에서 이상호, 양동현, 염기훈 등 주전 공격수들이 부상으로 무너진 공격진을 홀로 이끌었다. 34경기에

출장해서 7골 6도움을 기록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내게 된다.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획득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진호의 좋은 추억은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2009년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진호, 최대의 라이벌을 만나다 (2009년 ~ 현재)





2009년 김호곤 감독이 부임한 후 그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된다. 김호곤 감독이 이진호 감독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고, 그의 출장 기회는 조금씩 줄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순히 감독과의 마찰만이 문제가 아니였다. 사실 교체출장

이 늘어나긴 했지만 23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지금까지 그가 울산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유일한 타겟형 공격수라는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보다

무려 12센치가 더 큰 김신욱이 입단하면서 타겟형 공격수 자리를 놓고 본격적인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김신욱은 첫 해

27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다. 기록상으로는 비슷하지만 김신욱이 급격히 성장한 반면 이진호는 점차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교체출장한 경기에서 김신욱은 득점으로 자신을 보여주었지만, 이진호는 교체출장 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김호곤 감독의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2010년 시즌 오르티고사-김신욱 원투 펀치가 위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진호는 사실상 후보로 밀리게 되었고, 결국

후반기에 포항으로 임대를 가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이 해외 이적을 바라고 있을 때, 울산에서 평생 뛰는 것을 꿈꿨던

소박한 청년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포항에서 시즌을 마치고 울산에 돌아왔을 때 김신욱은 국가대표에 승선할 정도로

큰 선수로 성장해 있었고, 사실상 김신욱의 백업 맴버로 전락하게 되었다.

많은 팬들이 김호곤 감독이 이진호를 싫어해서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이진호 선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 견해는 절반은 동의 하지만 절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진호가 10대 유망주도

아니고, 군대까지 갔다온 20대 중반의 선수로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경쟁은 필수적이었다. 감독이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다고 해도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2011 시즌은 이진호가 도전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김신욱이 국가대표에서

복귀한 후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을 때 이진호는 감독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수원전의

선취골 정도, 좋은 활약을 보일 때 보다 부진한 모습이 더 많이 보였고,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인지 체중 역시 급격히

불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할 시기에 그렇지 못했던 것이 비단 김호곤 감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굿바이 이진호




결국 이진호는 대구로 이적하게 되었다. 지난번 팬들은 지난 포항 임대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포항 이적 당시

보여주었던 조직적인 반발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울산이 극도로 부진한 상황이었고, 감독의 전술이 정착되지 않아

감독에 대한 불만이 최고였었던 것에 비해 올 시즌은 3년만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감독을 비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이근호, 김승용 등 더 많은 공격수들이 영입되면서 그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될 것이라서 팬들은 그가 떠난 것은 아쉽고 분노할 일이지만 선수 본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

이다. 나도 그를 보내기 싫다. 그 역시 울산을 떠나기 싫어 한다. 하지만 이진호 선수가 울산에 계속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차라리 그가 뛸 수 있는 곳에서 더 좋은 활약을 기대하는 것이 팬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울산에서 시작해 울산에서 은퇴를 하고 싶다던 이진호의 소박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제 27의 젊은 선수에게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응원을 해줘야 겠다.

by Jude | 2012/01/10 23:17 | UHFC - MY LIFE | 트랙백 | 덧글(2)
이천수에 대한 생각, 그리고 추억






요즘 이천수 선수의 케이리그 복귀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사실 이천수의 복귀 여부는 전남과 선수 사이의 문제이지

다른 팀의 팬들까지 나설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축구팬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면 그가 분명 케이리그

최고의 스타였다는 것 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기억속에 이천수는 울산에서 페예노르트로 이적하는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울산에서 뛰었던 그 순간만은, 적어도

그라운드 안에서는 최고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기억은 2002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이미 그는 월드컵 예선을 치르면서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어느 팀에서 뛸 것인지 모든이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김정남감독의 강력한 설득으로 울산행을 결정짓게 된다.

표면상으로는 연봉 3억의 계약이었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연봉이 13억에 달한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파격적인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거기에다 해외이적을 보장받으며 이적 시 이적료의 75%를 선수가 갖는다는 엄청난 계약을 성사시켰다.

울산현대에서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천수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바로 "울산현대의 이천수"가 아닌

"이천수의 울산현대"였다는 것이다. 어린나이에 얻은 부와 명성, 그리고 케이리그에서 보여주었던 실력 뒤에는 김정남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감독은 이천수를 영입하면서 팀을 철저히 '이천수의 팀'으로 만들었다. 2003년 울산의

최고 전성기라고 불렸을 시절, 유상철, 김현석, 김정우, 이호, 최성국 등 이름만 들어도 최고의 선수들이 이천수 주연의

울산에 조연 역할을 했었다. 이천수의 울산은 완벽 그 자체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천수의 주연 역할이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 그는 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이적료 40억원 중 30억까지 자신의 몫이 되었다.

당시 많은 축구팬들이 이천수가 떠난 울산현대는 부진할 것이며, 반대로 잭팟을 터뜨리고 스페인으로 간 이천수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평균 90점을 넘게 받는 선수들 사이에 늘 백점만 받던

이천수가 사라지면서 나머지 선수들의 평균 점수가 함께 올라갔었던 것. 반면 이천수는 첫 경기에서 아쉽게 득점에 실패한 후

계속된 슬럼프 끝에 누만시아로 임대가 되었다.

부평고 시절, 청소년, 올림픽 대표, 고려대에 이은 울산현대까지, 이천수가 있었던 팀은 항상 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스페인이란 곳은 그러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선수 생활에서 찾아온 첫 번째 실패이자 지독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다시 받아준 팀은 김정남 감독이 있는 울산현대였다.


















































<울산 복귀 후 인터뷰>
























<울산 복귀 후 첫 연습경기에서 프리킥 골을 기록한 이천수>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울산으로 복귀했고,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연습경기 첫 날 부터

프리킥 골을 넣으며 부활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완벽한 프리킥까지 갖추면서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김정남 감독은 기꺼이 "이천수의 울산현대"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울산현대는 2005년 드디어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인천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수퍼컵 우승, A3 챔피언쉽 우승,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4강을 이끌며 케이리그에서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축구화 위에 슬리퍼를 신어 스터드를 보호하는 이천수>


다시 한번 성공에 도취되었던 탓일까? 아니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특히 위건행이 불발이 되면서 초조해졌었는지, 언론을 통해 울산 구단을 흔들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 제가 송고했던 아래 링크의 기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breaking/view.html?cateid=1027&newsid=20070215074509982&p=flamma
























계약에 있지도 않은 "이적료 중 자신의 지분 포기" 발언 후 팀에 함류하지 않게 되자 울산현대 구단에서 이천수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울산은 그를 네덜란드 폐예노르트로 이적시켜 버렸다. 이 것이 이천수와 울산현대 사이에

마지막이었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주연에서 조연으로 돌아간 이천수의 페예노르트 시절, 당시 큰 사기를 당하며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케이리그로

돌아오게 되지만 울산은 그를 거부했다. 아마 이천수 본인도 울산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수원으로

컴백을 하게 되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징계를 받았고, 전남으로 재 임대 되면서 케이리그에서 이천수는 완전히 퇴출되게 되었다.



사우디와 일본에서 활약아긴 했지만 여전히 울산현대에서와 같은 주인공 자리를 누릴 수는 없었다. 만약 이천수가

페예노르트 이적 전에 울산현대와의 관계를 잘 정리했었더라면, 다시 울산에서 부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울산현대에서,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축구선수만으로 평가했을 때는 난 그를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다.







<사진, 동영상 및 기사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으며, 재배포는 환영합니다만 댓글은 꼭 남겨주세요>

< 이 글은 이천수가 전남에서 임의탈퇴를 당하기 전까지를 적은 것이며, 절대 그를 옹호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읽어주시고, 페예노르트 이적 이후 내용에 대한 댓글에 대해서는 삭제를
하겠습니다. 예전에 이천수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가 이틀동안 만명이 블로그를 방문해 악플을 남겨준 기억이 있어서..>
by Jude | 2012/01/09 23:28 | UHFC - MY LIFE | 트랙백 | 덧글(2)
울산이 꼭 잡아야 할 선수!! 김영삼!!
2012년 새해가 밝았고, k리그에도 이적기간이 열리면서 굵직한 오피셜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울산에서 가장 큰 소식은 바로

감바 오사카 소속의 김승용과 이근호의 이적 소식이다. j리그 출신의 두 선수가 영입되면서 루시우, 김승용, 이근호, 김신욱 등

공격진의 파괴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설기현의 재계약까지 완료된다면 울산은 k리그에서 최상의 공격진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근호의 영입으로 인해 대구로 15억원 가량의 보상금이 발생했고, 울산은 현금 + 선수 1명으로 합의를 본 상태이다.

문제는 보상금 15억이다. 사실 그 정도의 비용이면 울산현대의 주전급 선수의 이적이 가능하며, 2011년 준우승의 주역 중 한 선수를

이적시킬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다. 현재 대구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외국인 선수를 활용하는 대신 수비형 미드필더나 풀백을

울산으로 부터 영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오고 있다. 울산이 15억 중 많은 부분을 현금으로 지불한다면

주전맴버들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전은 아니지만 울산이 꼭 필요로 하는 로테이션 선수를 한 명 잃을 수 밖에 없다.

울산이 대구로 내줄 수 있는 카드는 대략 세 장으로 요약된다. 공격수 이진호와 중앙 미드필더 김동석 그리고 미드필더 이면서

풀백을 소화할 수 있는 김영삼이다. 현재 대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카드는 김동석이다. 이미 그는 대구에 임대되어 한 시즌을

뛰었고, 미드필더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구로서는 검증된 선수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울산에서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바로 울산의 아들 이진호이다. 김호곤 감독과의 불화로 시즌 내내 후보에 머물렀지만, 경쟁자인 김신욱에 비해 활약을

못한 것은 사실이며, 플레이오프를 통해 김호곤 감독의 인지도가 급상승한 상황에서 이진호를 대구로 이적시킨다면 울산 팬들도

선수의 미래를 위해 그를 놓아줄 수 밖에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대구가 원하는 선수는 수비형 미드필더 및 풀백이 가능한

선수이며, 김영삼이 가장 적합한 선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진호나 김동석을 이적시키는 것은 울산 전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미 공격진은 포화상태이며, 이호와 에스티벤이

차지하고 있는 중앙 미들의 대체 자원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자랑하는 김동석 보다는 파워플한 홀딩형 김영삼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군 입대 후 울산으로 복귀한 김영삼의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이었다. 하지만 울산 팬들은 그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억하고 있다.

2005년 울산에 입단한 그는 첫 시즌부터 로테이션으로 활약하며 울산현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호-김정우로 이어지는

막강 중원 라인에서 백업으로 활약했던 그는 2006년 김정우와 이호가 해외이적을 하면서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6년부터 주전으로 올라서면서 A3 챔피언쉽 우승 및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4강을 이끌었고, 알미르, 이상호 등과

호흡을 맞춘 2007, 2008년 시즌이 그의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수원의 미남 미드필더 라인 백지훈-송종국-김남일 셋을

셋트로 막아내며 수원에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통해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9년 피로골절로 단 한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중원에는 슬라브코-오장은 조합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상무 입대를 택했고, 2011년 후반에 울산으로 돌아와 오른쪽 풀백으로 복귀하며 울산의 6강 진출을 도왔다.


김영삼은 100미터를 11초대에 끊는 엄청난 스피드를 무기로 삼고 있다. 아마 k리그 수비형 미드필더 중에서 제일 빠른 속도를

가진 선수 중 하나일 것이다. 즉 빠른 상대 공격수를 마크하는데 가장 적합한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티벤의 활동량과

이호의 홀딩력을 더하면 김영삼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다.


현재 울산은 에스티벤-이호의 완벽한 중원조합을 갖추고 있다. 이호의 홀딩 능력과 에스티벤의 엄청난 활동량이 합쳐서

울산 철퇴 축구의 중심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두 선수만으로 50경기 이상을 치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만약 중원에

과부하가 생겨 에스티벤이나 이호 중 한 선수가 전력에서 이탈한다면 대체할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만약 한 선수가 전력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에스티벤이나 이호가 상대적으로 기량이 부족한 다른 미드필더를 이끌고 경기에

임할 수 있지만 두 선수 모두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즉 중원에서 경험이 있는 선수가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고, 가장 적합한 선수가 김영삼인 것이다. 게다가 공격 수비 밸런스가 잘 맞는 풀백으로 이용이나

최재수가 빠질 경우 대체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울산이 김영삼을 잡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부디 울산 구단은 그를 대구로 보내지 말아 주소서..


by Jude | 2012/01/07 10:35 | UHFC - MY LIFE | 트랙백 | 덧글(4)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