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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이제는 그를 보내줘야 할때.. UHFC - MY LIFE




2012년 1월 10일 울산이 이근호 선수를 영입하면서 대구에 이진호를 보상선수로 이적시켰다. 울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05년

울산현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이었던 그의 이적으로 울산의 팬들은 많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제 곧 그를 대구로

떠나 보내야 하는 내 마음도 아프다. 그와 함께했던 9년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진호가 울산에 오기까지.. (~2002)

2009년 겨울, 이진호와 함께한 송년의 밤에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울산현대의 경기를 보면서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그리고 울산현대의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학성고 시절 과감히

브라질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브라질에서 발음하기 힘들어 과감히 Diego란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사인을 보면 Diego가 들어가 있다.



이진호는 처음부터 브라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히작했다. 사실 15세의 나이에 그가 속한 클럽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으며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진호가 말하길, 15세 이하의 대한민국 유학생들은 대부분의 클럽에서 최고의 기량을 이지만 그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유는 마의 16세를 넘기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함께 뛰는 서양인들이 급성장을 하게 되면서 신체조건이

우월해 지고, 서서히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독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진호는 유학생들이 힘들었던 마의 16세를 무사히 넘기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호와 함께 2002년

이탈리아 세리에 A리그 키에보 베로나로 정식 계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세리에 A 페루지아 소속에서 뛰었던 안정환이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이탈리아 전에서 극적인

동점골로 인해 이탈리아는 세리에 A의 외국인 선수 쿼터를 한 명 축소시키게 되었다. 결국 적은 외국인 선수 쿼터로 인해

이탈리아의 구단들은 즉시 전력감의 선수를 선호하게 되고, 유망주였던 그는 이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행히 울산현대에서 이진호를 불러주었고, 2003년 정식으로 울산에 입단하게 되었다.



울산현대에서의 새출발 (2003~2004)

이진호는 2003년 브라질 유학파 5인방으로 불리던 이형상, 송한복, 최우석, 이호와 함께 울산에 입단을 했다. 그의 나이 18세,

아직 어린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김정남 감독은 그의 능력을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그리고 2003년 12월 21일 하나은행 FA컵

8강전에서 꿈에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선발로 출장한 그는 김포 할렐루야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하며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특히 후반 7분에 터진 두 번째 골은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이 터뜨린 골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골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골이었다.

2004년 1군에 정식으로 등록을 하였고, 인천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K리그에 입성하며 그의 꿈은 이루어지게 된다. 출장기록은

단 세경기였지만 다음 해 최고의 활약을 위한 담금질이었다.



이진호의 전성기 (2005년)


이진호는 2005년 잊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내게 된다. 단순히 유망주에서 울산의 슈퍼 조커로 변신을 하며 울산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게 된다. 24경기에서 5골을 기록했고, 높은 제공권으로 단짝 마차도를 득점왕으로 등극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타켓형 스트라이커라는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팬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두 경기의 주인공이 된다.

1. 울산 k리그 최초 팀 300승 달성

2005년 10월 2일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 있었던 K-리그 부산 I-Park 와 원정경기에서 전반 7분만에

루시아노에게1골을 허용하며, 끌려갔다. 전반 40분 뽀뽀가 경고
누적으로 인해 퇴장을 당했지만 경기는 계속 부산에게

끌려가면서 전반전을 마치게 된다. 이진호는 후반전 교체로 출장을 하게 되었다.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던 울산은 후반 35분 다실바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하며 사실상 경기를 뒤집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3분뒤 이진호가 추격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40분, 41분 각각 이종민, 마차도가 동점 및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300승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이진호의 활약으로 3분만에 세 골을 넣는 진기한 기록이 달성된 날이기도 했다.

2. 플레이오프 성남전

2005년 11월 9일 전북에게 기적과 같은 3대2 역전승을 거두고 마지막 4강 티켓을 따낸 울산의 다음 상대는 성남이었다.

이진호에게는 상무 입대가 확정되고 가지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경기였다. 울산은 전반 남기일의 선취골로 끌려가면서

결승 진출이 위대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후반 시작과 함께 이천수의 크로스를 받은 마차도가 오버헤드킥으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을 했고, 38분 그날의 영웅 이진호의 극적인 헤딩 역전골로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입대 전

울산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으며, 결국 우승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남과의 플레이오프를 마치고 입대를 한 그는 군대에서 피로골절 판정을 받고 2개원 입영 연기를 통보받고 울산으로

복귀해 챔피언 결정전 2차전 후반에 교체출장을 하면서 결국 우승 트로피를 손에 안은 채 입대를 할 수 있었다.


너무 빠른 군입대, 아쉬운 선택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온 기회 (2006년 ~ 2008년)


이진호는 만 21세의 어린 나이에 군 입대를 선택하게 된다. 이제 울산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의 입대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입영을 끝까지 연기하다가 뒤늦게 상무로 가는 예가 많았지만

그는 과감한 입대를 선택했다. 사실 2006년은 울산으로서 매우 힘든 시즌이었다. 수퍼컵 우승 및 A3 챔피언쉽 우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리그에서는 득점력 빈곤으로 수비수인 박동혁과 유경렬의 득점이 모든 공격수들의 득점에 합보다

더 많을 정도였으며, 이진호라는 파트너를 잃어버린 마차도는 더이상 득점 기계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만약 그가

울산에 남아있었다면 울산 공격의 핵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상무 입대 첫 해에 부상으로 인해 단 11경기 출장에 그치며 주전경쟁에 밀리게 되었다. 사실 20대 초반은 가장 왕성한

성장을 보이는 시점인데 상무는 경기에는 출장할 수 있었지만 그를 성장시켜줄만한 곳은 아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

에서 더이상의 성장이 멈춘 그는 2007년 24경기를 출장하긴 했지만 단 두골이란 기록을 남긴 채 울산으로 복귀했다.


김정남 감독은 울산으로 돌아온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스트라이커 우성용이

노쇠한 상태에서 이상호, 양동현, 염기훈 등 주전 공격수들이 부상으로 무너진 공격진을 홀로 이끌었다. 34경기에

출장해서 7골 6도움을 기록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내게 된다.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획득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진호의 좋은 추억은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2009년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진호, 최대의 라이벌을 만나다 (2009년 ~ 현재)





2009년 김호곤 감독이 부임한 후 그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된다. 김호곤 감독이 이진호 감독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고, 그의 출장 기회는 조금씩 줄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순히 감독과의 마찰만이 문제가 아니였다. 사실 교체출장

이 늘어나긴 했지만 23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지금까지 그가 울산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유일한 타겟형 공격수라는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보다

무려 12센치가 더 큰 김신욱이 입단하면서 타겟형 공격수 자리를 놓고 본격적인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김신욱은 첫 해

27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다. 기록상으로는 비슷하지만 김신욱이 급격히 성장한 반면 이진호는 점차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교체출장한 경기에서 김신욱은 득점으로 자신을 보여주었지만, 이진호는 교체출장 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김호곤 감독의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2010년 시즌 오르티고사-김신욱 원투 펀치가 위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진호는 사실상 후보로 밀리게 되었고, 결국

후반기에 포항으로 임대를 가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이 해외 이적을 바라고 있을 때, 울산에서 평생 뛰는 것을 꿈꿨던

소박한 청년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포항에서 시즌을 마치고 울산에 돌아왔을 때 김신욱은 국가대표에 승선할 정도로

큰 선수로 성장해 있었고, 사실상 김신욱의 백업 맴버로 전락하게 되었다.

많은 팬들이 김호곤 감독이 이진호를 싫어해서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이진호 선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 견해는 절반은 동의 하지만 절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진호가 10대 유망주도

아니고, 군대까지 갔다온 20대 중반의 선수로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경쟁은 필수적이었다. 감독이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다고 해도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2011 시즌은 이진호가 도전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김신욱이 국가대표에서

복귀한 후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을 때 이진호는 감독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수원전의

선취골 정도, 좋은 활약을 보일 때 보다 부진한 모습이 더 많이 보였고,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인지 체중 역시 급격히

불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할 시기에 그렇지 못했던 것이 비단 김호곤 감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굿바이 이진호




결국 이진호는 대구로 이적하게 되었다. 지난번 팬들은 지난 포항 임대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포항 이적 당시

보여주었던 조직적인 반발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울산이 극도로 부진한 상황이었고, 감독의 전술이 정착되지 않아

감독에 대한 불만이 최고였었던 것에 비해 올 시즌은 3년만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감독을 비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이근호, 김승용 등 더 많은 공격수들이 영입되면서 그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될 것이라서 팬들은 그가 떠난 것은 아쉽고 분노할 일이지만 선수 본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

이다. 나도 그를 보내기 싫다. 그 역시 울산을 떠나기 싫어 한다. 하지만 이진호 선수가 울산에 계속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차라리 그가 뛸 수 있는 곳에서 더 좋은 활약을 기대하는 것이 팬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울산에서 시작해 울산에서 은퇴를 하고 싶다던 이진호의 소박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제 27의 젊은 선수에게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응원을 해줘야 겠다.


덧글

  • 무펜 2012/01/11 17:04 # 답글

    임종은 선수도 성남간다는거 같은데요..
  • Jude 2012/01/11 17:12 #

    임종은은탈울산해야성공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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